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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백년 꿈과 같네

WG 草心 방송 출연 기록 정보

by 草心 2013. 1. 2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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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찾는 모든 유저님들 항상 가정과 삶에 태평성대를 누렷으면 합니다.

 

 

인생백년 꿈과 같네

 

박송희 명창 -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 보유자

 

1927년생, 전남 화순.



 


정말 꿈만 같다. 스승님을 만나 소리를 배우고, 스승님 머리맡에 있던 시 한수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던 날이 어제처럼 생생한데, 벌써 스승님이 돌아가신지 27년째. 덧없는 인생을 용기있게 살아가며, 마음 구석구석에 비집고 들어와 앉은 온갖 응어리들을 삭혀낼 수 있는 판소리의 세계를 제자에게 물려준 분, 박송희 명창(80)에게 스승 박녹주(1905~1979)는 그런 분이었다. 

어느덧 나이 여든이 되어 기념음악회를 하게 되었지만, 그보다는 먼저 스승님의 탄신 101주년을 알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승님을 기억할 수 있도록. 소리의 참맛을 가슴 깊이 새길 수 있도록. 극장을 가득 채우고도 여기저기 서 있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소리와 하나가 되어 사라진 예인의 넋을 만난다.(2006.5.28. 박녹주 선생 탄생 101주년 박송희 선생 팔순 기념공연 ‘동편제 소리의 맥’)


해마다 봄이 되면 어른들은 진달래 꽃이 곱게 피어있는 아담한 산등성이로 소풍을 갔다. 발그레한 꽃모양이 살아있는 예쁜 화전을 부치고, 장구장단에 맞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송희의 고향 전남 화순에서는 어린 아이들도 곧잘 단가를 부르곤 했다. 어린 송희는 그 가락이 너무 좋았다. 봄바람에 취한 듯, 송희의 마음은 소리에 배어있는 아련한 속삭임에 빠져들었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찾은 곳이 광주예기조합(光州藝妓組合). 권번(券番)이라 하여 기녀들의 교육양성기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송희의 기억으로는 규율이 엄격한 훈련소같은 곳이다. 품행이 단정해야 하므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줄을 지어 걸어갔고, 먹을거리도 함부로 사먹을 수 없었다. 시조, 가곡, 가야금 등의 음악 뿐 아니라 승무, 검무, 꽃춤 등 무용과 일본어까지 배워야 하는 2년 과정의 집중훈련이었다.


‘기교목이 없고 쫙쫙 뻗는 힘이 있는’ 동편제와의 인연

많은 스승들이 송희의 소리의 원천이다. 열 살무렵 단가를 가르쳐주셨던 성차옥 선생을 비롯하여 박영구, 정응민, 안기선, 김억순, 조상선 등 당대의 대표적인 명창들의 가르침을 받아 송희는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흥보가, 춘향가, 수궁가를 이어받아 소리목을 단련하였다. 그 중 박기홍 선생은 조선 후기의 판소리 명창으로 시조, 가사, 거문고, 가야금 등에도 능했던 동편제의 창법을 이어받은 마지막 종장(宗匠)이다. 오늘날 송희가 동편제 소리를 계승하게 된 첫 번째 인연이라고나 할까? 박동실 선생(1897~1968) 역시 어려서부터 애기명창으로 불리며 서편제의 큰 줄기로 일컬어지던 분이다.

동편제란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순창·곡성·구례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서, 가왕으로 일컬어지는 운봉 출신의 송흥록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우조(씩씩한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감정을 가능한 절제하며, 장단은 '대마디 대장단'을 사용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발성은 통성을 사용하여 엄하게 하며, 구절 끝마침을 되게 끊어내는 소리이다.

이에 비해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 지역인 광주·나주·담양·화순·보성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 순창 출신이며 보성에서 말년을 보낸 박유전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계면조(슬픈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며, 발성의 기교를 중시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 소리가 늘어지는 특징을 지니며, 장단의 운용 면에서는 엇부침이라하여, 매우 기교적인 리듬을 구사한다. 또한 발림(육체적 표현. 동작)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또한 중고제는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전승된 소리로, 송흥록과 동시대 사람인 강경 출신 김성옥으로부터 출발되었다. 음악적 특색은 비동비서(非東非西), 혹은 동·서편의 중간으로 상하성이 분명한 특색을 가지고 있는 소리이다.

다양한 기교와 발림으로 시각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서편제에 비해 장식이 없고 소리꾼의 풍부한 성량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정통한 소리를 중심으로 하는 동편제는 송희의 삶과도 닮은 듯 하다.


햇님국극단의 주연배우로 활약

한 사람의 소리꾼이 서서 노래하던 판소리의 형식이 내용에 따라 각각 배역을 나누어 맡는 연극적인 형식으로 변화한 것이 창극이다. 창극(唱劇)은 연출자에 의해 연기와 노래로 구성되었고, 배우를 위한 의상과 분장, 사실적인 표현 등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원래 많은 관객들이 모인 야외에서 공연하던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남성이 많았으나, 이와 같이 극장공연형식이 도입되면서 여성 소리꾼들의 활동범위도 확대되었다. 예기조합에서 정악으로 훈련받은 여성들은 창극의 풍부한 자원이었다.

1936년경 임방울, 박초월, 박귀희 등이 중심이 되어 ‘동일창극단’을 창립하였고, 송희도 단원이 되어 2년간 활동하였다. 지역순회공연을 다니며 새로운 스승을 만나 소리의 세계를 더욱 확장하는 시기였다. 대중의 관심을 모으는 직업이다 보니 유혹도 있었다. 어린 송희이지만, 꿋꿋하게 자신을 지켰다. 그 때 화려한 생활에 현혹되지 말라고 충고하며 도움을 주었던 조상선 선생도 송희에게는 잊지 못할 스승이다. 그러나 극단이 만주로 이동하게 되자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치고 송희의 첫 번째 창극단 활동은 중단되었다.

1945년 송희는 전남 순천의 서정갑과 혼인을 한다. 송희의 아버지를 1년 넘게 쫓아다니며 청혼하던 사람이었다. 음악에 조예가 있어 거문고와 대금도 연주하고, 앞으로 판소리를 더 공부하면 좋은 때가 올 것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살림은 풍족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송희는 다시 경제활동에 나서게 된다. 

당시 창극계에 남자 명창 못지않은 기량을 지닌 여류 명창이 많아지자, 창극 공연을 통해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들만의 조직을 모색하게 되었고,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가 결성된다. 박녹주, 김소희, 박귀희, 임유앵, 임춘앵, 김경희 등 여성 단원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이 단체는 여성국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다양한 공연 활동을 통해 축적해 온 여류 명창들의 역량과 자신감이 여성들만의 공연 단체를 만들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1949년 서울 시공관에서 공연한 김아부(金亞夫) 작(作) ‘햇님 달님’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햇님왕자에 박귀희, 달님공주에 김소희, 영왕 정유색, 햇님 아버지는 박녹주가 배역을 맡은 이 공연은 대형 무대장치와 호사스러운 의상․소품 그리고 여성들만 출연한다는 점 등이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송희도 바로 이 극단의 단원이 되어 다시 소리와 연기를 하게 되었다.

이 때 같이 활동을 하였고, 지금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는 조순애(78세)씨는 “여성단원들끼리 모여 생활하다 보니 아이들도 같이 지방 순회 공연에 데리고 다니는 단원들이 많았다. 한 아이가 홍역에 걸리면 다른 아이들도 모두 전염이 되어 고생하곤 하던 때가 추억으로 남아있다”며 일하는 어머니로서 육아의 어려움을 겪던 시절을 회상한다. 송희도 극단 생활을 하면서 아들 둘을 얻었다. 작은 아들은 누구에게나 낯을 가리지 않아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 아이들의 기저귀를 말리기 어려워 젖은 기저귀를 배에 감아 말리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그래도 여성국극의 인기가 높아 고생하는 줄 모르고 일하던 시기였다.

1956년 ‘햇님국극단’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송희는 주연 배우로 활약한다. 송희의 고운 목소리와 재치있는 연기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길을 걸어갈 수도 없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대중의 인기는 허망하였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고, 영화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여성국극은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송희는 수년간의 창극 활동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예인의 삶에서 일상의 삶으로, 전문직 여성의 삶에서 농업여성이며 주부의 삶으로 돌아갔다. 평범한 생활 속에 딸 둘이 태어났다. 2남2녀를 키우기에 집안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다. 시어머님의 3년상을 치르고 송희는 다시 판소리에 정진해보고자 서울로 올라온다.


무섭고 꼿꼿하고 부드러운 박녹주와의 만남

박송희는 2002년 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박녹주의 동편제 흥보가의 맥을 잇는 전승자가 된 것이다.

다시 판소리에 정진해보고자 상경한 송희가 먼저 찾은 것은 여성국악동호회에서 인연을 맺은 김소희 명창(1917~1995). 후에 ‘춘향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분이다. 김소희에게 ‘춘향가’와 ‘심청가’를 사사하며 소리의 감각을 새롭게 한 송희는 박봉술(1922~1989, 후에 ‘적벽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게 ‘적벽가’와 ‘수궁가’를, 정권진(1927~1985, 후에 ‘심청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문하에서 ‘심청가’를 사사하였다.

그리고 찾은 스승이 박녹주 명창.

박녹주는 1905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79년 타계할 때까지 현대 판소리사의 중심에 서서 치열한 예술적 삶을 살다간 판소리 명창이다. 그는 20대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신예 명창으로 주목을 받았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판소리 명창으로 우뚝 서서 현대 판소리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박녹주는 여류명창으로는 드물게 동편제 판소리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이는  박기홍, 송만갑, 김정문, 유성준 등 당대 최고의 동편제 거장에게 동편소리의 진수를 배웠다는 긍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녹주가 동편제 법통에 매달렸던 또 다른 이유는 창극으로 인해 크게 훼손, 변질된 판소리의 본질을 되찾고자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박녹주도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성악연구회에 몸담으며 창극의 주역을 맡았고, 해방 후에는 직접 여성국악동호회와 국극사를 조직하여 창극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지만, 판소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떠한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에게 창극으로 인해 판소리가 속화(俗化)되는 현실은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열어 정통 판소리 전승에 힘쓴 것도 회한에 찬 반성적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송희는 이미 국극단 활동 시절에 박녹주에게 ‘흥보가’를 사사받은 바 있었다. 제자들은 박녹주를 무서워하였지만, 송희는 꼿꼿함 속에 감추어진 스승의 부드러움을 기억한다. 다시 소리의 세계로 돌아온 제자에게 “배움에 필요한 돈이 없어도 소리만 잘하면 된다”던 박녹주 선생이 너무 고마워 돌아가실 때까지 잘 보필하기로 마음 속으로 굳은 결심을 했다. 박녹주의 동편제 소리 ‘흥보가’는 남성 소리꾼의 ‘흥보가’에 비해 점잖고 담백하다. 대중 앞에서 즉흥적으로 익살스럽거나 외설적인 부분을 끼워넣기도 하는 남성 소리꾼에 비해 여성 소리꾼의 경우는 그런 부분들이 축소되거나 삭제되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송희는 판소리 다섯마당을 모두 수련하게 되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허리끈을 바짝 동여매면 고생도 달아난다고 했다. 소리를 통해 고생도 잊고, 마음도 비웠다.

그래도 판소리를 공부한 후에는 무대공연과 방송을 하게 되었고 조금이나마 살림에도 보탬이 될 수 있었다. 1983년부터는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다듬어온 공력있는 소리와 익숙하고 능란한 연기로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무대 위에서 소리에 몰입하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스승의 가르침으로 무형문화재의 명예를 얻었으니, 흥보가의 명맥을 살려야 한다.

박송희는 스승이 돌아가시면서 바로 전날 남긴 시 ‘인생백년’에 곡을 붙여 단가로 만들었다.


“인생 백년 꿈과 같네.

 사람이 백년을 산다고 하였지만 어찌하여 백년이랴, 죽고 사는 것이 백년이랴.

 날 적에도 슬프고 가는 것도 슬퍼라.

 날 적에 우는 것은 살기를 걱정해서 우는 것이요, 갈 적에 우는 것은 내 인생을 못 잊고 가는 것이 서러 운다.

 인생 백년이 어찌 허망하랴.

 엊그제 청춘홍안이 오늘 백발이 되고 보니, 죽는 것도 섧지마는 늙는 것은 더욱 섧네.

 인생 백년 벗은 많지마는 가는 길에는 벗이 없네.

 장차 이 몸을 뉘게 의탁하리, 차라리 이 몸도 저 폭포수에 의탁하였으면 저 물고기와 벗이 되련마는.

 그러나 서러 마라. 가는 길 오는 세월 인생무상을 탓하리오.

 어와 세상 벗님네들 이 내 한 말 들어보소.

 청춘 세월을 허망히 말고 헐 일을 허면서 지내보세.”


할 일을 하면서 지냈으니 후회는 없다. 여자 팔자는 남편 밥 먹는 것이 최고라지만 박송희의 삶은 소리가 있어 더욱 향기롭다.

이제 제자들을 키워내는 것이 박송희의 몫이다. 2000년 판소리 전수소 ‘소리재’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국립극장 문화학교를 찾는 소리애호가들을 위해서도 매주 시간을 쪼개고 있다

 

 

찾아가는국악여행 소속 산원이 오랜만에 회장님글을 가져 왓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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